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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험미술_김미경 선생님

한국의 실험미술 / 김미경 지음


글을 시작하며


이 책은 나의 박사논문 「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2000)를 수정 보완하여, 한국의 실험미술을 보다 알기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꾸민 것이다.

  내가 박사논문을 발표했을 때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동료와 후학들은 주제설정이 좋았다고 격려해주기도 했던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많은 기록자료를 모안호은 것일 뿐이라고 일축하거나 소외되었던 작가들의 입장을 새삼스럽게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말들에 처음에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것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길이 아직은 외롭고 힘든 길임을 다시 인식하고 역설적으로 용기와 담대함을 잃지 않도록 나 스스로를 격려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1960-1970년대 한국의 미술현상들 중 일부 활동을 '실험미술'이라 부르려 한 것은 기존의 회화와 조각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오브제와 설치, 해프닝과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 작업들을 묶어서 부를 특정한 용어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 세대 이전의 미술현상에 새로운 용어를 적용하기란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실험미술이라는 용어가 서구에서 특정 조류를 가르키는 말로 확정된 바 없었다는 이유로 한국의 이 활동들을 실험미술이라는 고유명사로 묶어 부르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이 활동들이 한국에서 '흔히' 실험미술이라고 불리어져 왔던 것도 잘못이라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견해들 자체가 극히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며 한국에서 이뤄진 일련의 활동들이 기왕에 확정된 서구미술의 다양한 명칭(환경미술, 옵아트,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으로 일컬어졌을 뿐 실험미술이라는 총칭으로는 불리어지지 않았으며 '실험' 혹은 '실험적 태도'라 불리어졌을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당시 나는 이를 근거해 '1960-197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이라 부르고자 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탈평면 미술'이란 말을 제안하기도 하나, 그 또한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보다도 더 모호하고 소극적이며 광범위한 것 같다.

  나는 당시 격동적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작업들을 발굴하고 재해석해 '실험미술과 사회'라는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러므로 당시 실험미술 가운데 조형적-정신사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작업들은 거의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이 또한 오해의 소지를 남겨놓은 듯 하다. 왜냐하면 '사회사적 의미를 가진 작업만이 실험미술인가'라는 질문을 간혹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언하자면 나의 논문은 '실험'이라는 분위기 아래 장르의 경계를 넘는 1960-1970년대의 다양한 실험들 중에서 당시 '사회'를 투영시키는 것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작업들을 추출한 뒤 예술과 사회를 연결짓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던 시도였으므로 사회를 투영시키는 작업을 실험미술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실험미술 중에서 사회를 투영시킨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추려내는 작업이었다.

  한국현대미술은 자료의 양적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가 진척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불모 상태를 개선할 방안과 대안을 내놓는 대신 10-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불모 상태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여전히 잘를 토대로 검증하지 않고 임의적 해석을 해 왔으며, 직접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새롭게 해석하려는 성실함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증적 기록자료를 토대로 쓰는 미술사가 따로 있고 해석적 미술사가 따로 있다는 식의 말을 한다. 그리고 실증기록자료를 토대로 하는 미술사는 일종의 자료사 내지 자료집으로 쉽게 치부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증자료 자체는 자료에 그칠 뿐이지만 그 자료의 바탕과 근거가 없는 해석적 미술사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1970-1970년대는 제3공화국에서 제4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부의 격동기이다. 이 시기에 관해서는 최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등의 역사적 재평가와 재조명이 이뤄져 4.19혁명과 5.16 군사쿠테타의 변혁부터 새마을 운동과 암흑기 유신체제 하의 숨가쁜 한국 정치-사회사를 이어왔던 시대를 이제 새삼스럽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이 시기에는 케네디 암살과 베트남전에 따른 세계적 반전 운동이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의 목소리로 드높았으며, 히피와 노-장자 사상 등을 통한 서구사회 비판과 반성이 거셌다. 이와 더불어 여성운동이 제3세계에 대한 관심과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에 세계의 미술계 또한 엄청난 격랑을 거치며 다양하게 변모했다.

  내가 10여년 전 처음 이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의 최대 의문은 '왜 이러한 격동기의 세계사와 한국사 속에서 미술을 들여다보는 관점의 연구서나 비평서가 없을까'였다. 물론 1980년대 초, 대학원 시절에 형식주의 모더니즘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것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다만 한국현대미술을 우리 손으로 다시 다듬는 일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단순한 생각에 앵포르멜과 단색조 회화*(단색조 회화라는 명칭 외에 모노크롬이나 모노톤 회화, 단색화, 단색 회화 등의 명칭이 있지만 나는 모노크롬(Monochrome)이 하나의 색으로 된 그림이라는 원래적 의미가 있고 단색화나 단색 회화 역시 하나의 색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음을 주목한다. 따라서 한국의 1970년대 단색조 회화가 하나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기보다는 모노톤(Monotone), 즉 유사한 색조가 어울려 하나의 톤(tone)을 이룬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단색조 회화라는 명칭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모노하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어 세계 미술시장에 그 존재를 알린 과정을 생각하면 소위 '한국적'임을 내세웠던 하나의 조형적 흐름에 독자적인 우리의 명칭을 애초에 명명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만 하지만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그것을 새로운 명칭으로 부른다는 것도 새삼스럽기 때문이다.) 연구에 착수했으나, 우리의 격동기 사회 속에서 미술이 괴리되어 있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좌상파 국전'이라든지 '국전의 문제점' 같은 이슈로 제도권 미술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앵포르멜 세대가 이룩한 최대의 성과인 제도권 개혁과 '한국적' 특성으로서 대두된 단색조 회화는 정치-사회적 격동기 현실과 여전히 괴리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이 시대 한국의 미술현상을 해석하는 기타 관점은 왜 보이지 않는가 라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예술은 기성제도와 아방가르드가 공존할 때 상생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방가르드에게서 도전을 받을 때 기성제도는 개혁되며 견제장치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국전은 보수로서의 역할이 있고, 아방가르드는 재야로서의 임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국전이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려는 것은 애초부터 헛된 시도였다. 우리가 서구와 일본에서 배워야 할 점은 이것이었다.

  '한국성'이라는 말처럼 획일적인 말이 있을까 싶다. 유독 우리는 한국성을 흠모한다. 그러나 한국성이라는 말로 한국현대미술을 끝내 규정짓고 싶어하는 한 우리는 획일성을 벗어날 수 없다. 오직 작가나 그룹의 개성 있는 역량과 그것을 우리의 날카로운 눈으로 평가하는 비평과 미술사만이 참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예술이 시대 및 사회현상에서 전적으로 독립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예술을 사회사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미술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5.16 군사쿠테타에서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1960-1970년대 격동기 한국의 사회사 속에서 예술을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는 단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참여미술과 순수미술으 구별하기 이전에 예술이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자 하는 태도가 무조건 억제되었던 유신의 여파에서 벗어날 때가 벌써 지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80년대 민중미술이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사회에 대해 발언했던 것과 실험미술의 성격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 이 시기의 실허미술가들은 적극적인 정치성향을 띠지 않았으며 소위 소외된 민중의 반항적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미술이 어떤 형태로든 집단적으로 표면화되지도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1970년대 유신의 서슬 아래 반정부 활동을 표방하는 참여예술이 아직 조직화 되지 않았던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



3/196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과 사회

3-1. 3공화국의 괴리된 미술과 사회

 

p.24~26 일찍이 1960 4.19 혁명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한국미술과협회(한국미협)와 대한미술과협해(대한미협)가 모든 예술단체를 단일화하라는 혁명정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미술협회로 통합하고, 재야단체들은 현대미술가 연합으로 합쳐지게된다. 이는 국전에 저항해 오던 재야 미술인들이 뭉쳐 행동을 집단화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고, 이제까지 집단적 움직임이 뚜렷하지 못했기에 세계의 미술계로부터 고립되었던 한국미술의 국제적인 진출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촉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현대미술가연합(현대미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던 현대미술과협회는 제6회 현대작가초대공모전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기금전으로 열어 국제전 참여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1961년 국전에서 군사정부의 최고상이라 할 최고회의장상이 김형대의 환원B>에 수상되어 추상화의 국전 진입을 알리는 등 정치혁명과 혁명적 미술의 동반관계를 입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국의 미술계에서 발판을 구축한 추상미술은 5-6년간 한국의 전위대 역할을 했으나 1966-1967년의 시점에서는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미 <악뛰엘전>이 앵포르멜에서 오브제를 도입하는 경향으로 변화하는 단계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서보/장성순/김봉태,.’그 전시에는 앵포르멜뿐만 아니라 오브제도 새롭게 도입되고 있었다.’) … 2 <악뛰엘전>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당시의 사회상황 속에서 접근할 때 새롭게 밝혀질 수 있다. 기존의 평가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앵포르멜의 형식을 취한 악뛰엘에 포화상태의 한계점에 이르러 자기해체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은 당시의 사회상황이다. (2 <악뛰엘전>이 열린 1964년은 한일회담에 대한 극심한 반대시위로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던 때/6.3학생시위/3.24 데모 등)

 

p.27-29 역사평가의 측면에서 볼 때, <악뛰엘>*(한국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1961년 연합전을 가진 뒤 악뛰엘로 합쳐서 1962(중앙공보관), 1964(현대미술관) 2회 전시를 가졌다.)의 종말은 주로 앵포르멜의 자기소멸이라는 측면에서 해석되어 왔으며 사회적 여건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앵포르멜의 보다 총제적이고 근본적인 종말의 원인은 그 자체의 포화상태뿐만 아니라 새롭게 제시된 오브제에 대한 자기확신의 부족과 자기선언의 부재 그리고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던 시국의 상황에 의해 전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악뛰엘의 평면 회화로부터 튀어나오는현상은 일본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의 제 9(1957)-12(1960) 무렵 나카니시 나츠유의 <세탁집게> 등 회화의 표면에서 오브제가 튀어나오기 시작해 ()회화로 향하는 겉잡을 수 없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제2 <악뛰엘전>은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일반인은 얼씬도 못하고 군인들만 전시장을 지키는 가운데 끝났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는 앵ㅍ르멜의 자기 소멸이라고 결론을 내버렸다. <악뛰엘전>에 출품된 작품들의 구체적인 성격과 당시 사회적 상황은 이제 한국현대미술사에 새롭게 포함되어야 할 시점이다.

  또한 <원형회전>(1964)과 관련해 방근택은 현대화단이 수년전부터 앵포르멜 캔버스 그림에서 맴돌고 있어 전위의 정지와 따분한 실망을 주어왔던 차에 조각이 재기의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하면서 이승택/조성묵/박종배/김영학/최기원의 오브제 작품들을 언급했다. 그러나 <원형회전>이 실험미술의 선봉에서 앵포르멜의 한계상황을 레디메이드와 오브제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움직임으로 확대되지 못했던 저변에는 당시의 경직된 사회현상과 대중의 몰이해가 깔려있다.

이렇든 새로운 전위 혹은 실험미술의 싹은 초기부터 암초를 만나 난항을 거듭했던 한편, 이들의 비판대상이었던 기성미술계는 국전을 중심으로 여전히 논란이 심했다. …이일은 아카데미즘이 한 나라의 미술을 대표한다면 그것은 후진성을 노정하는 것이며 이미 국전에서 수많은 경화증의 추상작품도 볼 수 있었다고 하면서 국전은 국전 나름의 아카데미즘을 고수하고 젊은 세대는 국전만이 영광에로의 길이 아님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1966)’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한국의 미술계의 판도가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었으며, 일본 관전파의 답습과 경화증의 추상작품이 뒤얽혀있는 국전 밖에서 젊은 세대의 발언의 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전위적인 실험미술이 발언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을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한국의 1960년대 예술과 사회의 괴리양상은 이 같은 상황의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예술이 뛰어넘기 힘든 장벽은 무엇보다 남북분단 상황이라는 정치적 긴장감 속에서 군사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술의 자유와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실험미술을 경계했던 문화적 후진성이었다.

 


3-2. 실험미술의 전개

1) 탁평면의 개시(2<무동인전>

 

p.30-33  홍익대학교 동문들로 구성된 무동인은 제로 그룹<zero group>이라는 이름으로 1967 2회의 전시를 가졌다.  … 1회전은 앵포르멜 경향의 캔버스 작업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오브제를 도입하고 있었다. …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는 측면은 서구 및 일본의 경향에 늦게나마 민감히 반응하면서도 한국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이 전시가 한국의 사회,정치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측면에서 주목된 적이 전혀 없었다는 부분이다. <현대미술실험전>이라는 타이틀을 내 건 제2회전(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했으나, 파괴적이나 선동적이지 않았던 전시)에서도 언론은 가보나마나 그게 그것인 타성과 안일에 빠져있는 한국미술의 위기와 전위를 자처하는 추상작가들이 예술 본래의 목적을 떠나 사회적 타협만을 일삼는 작품태도에 반발해서 오늘의 새로운 물결을 타고 감성의 혁신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고 하면서 폐물과 오브제들은 외국에서 이미 실험이 끝난 모방에 지나지 않지만 대중들에게 미친짓이라는 조소를 받아가며 인습화된 추상적 감성에 저항하기 위해 작품전을 연 순수한 전위적 예술 태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보도했다.

당시 국내의 미술계는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지조차 전무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책방에서 그나마 구할 수 있었던 서구 및 일본 잡지를 통해 세계의 미술 흐름을 파악하고자 했다. 최붕현은 군대 제대 후 자신의 작품의 진로를 모색하던 중 일본의 미술잡지 『미술수첩』 등을 통해 외국 사조의 흐름을 보니, 오브제 및 설치미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국내는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를 고수하고 있어 자신은 새로운 오브제를 다루기로 했다고 말한다. 1960년대 한국에서 오브제 미술을 새롭게 시도하는데 있어 국내 현대미술잡지가 매개 역할을 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미술수첩』만 하더라도 1960년대 중반 이전에는 앵포르멜 추상미술에 관한 기사와 그림이 주종을 이루다가 중반 이후 급속히 오브제와 설치미술, 그리고 해프닝이 소개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외국의 미술잡지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해외의 오브제 미술이 한국의 실험미술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때, 오브제는 한국사회에서 독특하게 발생할 수 있는 성격의 것들로 변신하게 되므로 해석적 차원에서의 또 다른 새로운 성격을 띤다.

p.42 이후 앵포르멜에서 탈피해 새로운 오브제와 설치미술의 국제동향에 참여하면서 작가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던 이들의 작업은 곧이어 <청년작가연립전>으로 이어졌다.

 

p.43-47

2) 최초의 해프닝과 탈평면의 전개(청년작가연립전)(1967.12)

그동안 학계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로서 앵포르멜과 단색조 회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청년작가연립전>과 같이 기존의 앵포르멜 경향에서 탈피해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국내에 알리려고 했던 선구적인 작업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신문지상을 통해 서구의 전위적 경향들에 대한 정보가 일반에게 보도되었고, 이 전시가 다소 때늦은 시도라는 점도 알려져 있었으나 이들에 대한 평가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뒤늦게나마 앵포르멜을 탈피하는 이런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다는 식의 평가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지나간 서구 사조의 모방이다라고 한계를 지적하는가 하면, ‘괴상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일반인들의 반응 등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이들의 작업이 당시 서구사조의 뒤늦은 모방이라는 한계를 지적 받았든, 일반인들이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든 간에 이들의 작업 속에는 당시 한국사회에 대한 발언과 제도권 내의 기성 미술계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당시 이일은 이제까지 있어온 추상에 대한 반동이며 세계적 물결을 탄 것이다. 추상일변도였던 전우운동을 박찼다는 점에서, 개개인의 작품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 이전에 우리 나라 미술사에 새로운 전망을 터주었다고 평했고 이구열은 이것이 미술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세계의 새로운 미학을 우리의 젊은이들이 의식했다는 점에서만도 그 용기를 사주어야 한다. 금년도 뿐이 아닌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이벤트로 주목할만하다고 했다. 오광수는 추상화 10년을 마감하는 새로운 미술사의 모멘트..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활하는 미술, 환경을 조성하는 미술에 있다고 평가했다. <청년작가연립전>이 당시의 국내 미술계에 참신한 느낌을 줄 수 있었던 것은 포화상태에 다다른 앵포르멜에서 탈피한다는 전제아래, 오브제, 네오다다, 팝아트, 옵아트 등이라 지칭된 작업방식을 지향하고 음향과 빛, 해프닝 등 새로운 경향을 집단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집단적으로 시도한 실험미술에 대해서는 평가 자체가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을 내세우며 그저 보고 느끼면 된다든지 침체한 한국미술, 미술에 대한 기성관념을 향한 도전이라는 주장이지만 첫눈에 괴상한 미술이라는 인상이다라는 기사보도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들의 새로운 방식은 그때까지도 국내의 대중들은 물론 미술계 일반에게 낯설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일/오광수 선생이 회의적이게&한계점이 있다고 평가한 부분 포함되어있음 이들 작가군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더 이상 괴상하고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공신력 있는 국제 비엔날레의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새로운 전위로서 국내에서 인정받고자 했음 국제적 동향과 발맞추는 작업의 당위성을 알리려는 시도를 계속 진행함 )

p.52-55 오리진

홍대 졸업생 8명으로 대학 4학년때 결성되었던(1963)그룹..

.. 앵포르멜 이후 기하적 추상을 지향하는 시도를 집단적으로 표명한 국내 최초의 그룹, 오리진은 서구 기하추상의 원류부터 분석하고 작업하지는 않았으나 당시에 유입 가능한 정보들을 통해 스스로 맞는 추상작업을 한 셈이다. 그들은 20세기 초구 서구의 기하추상 개념에 자신을 구속시키기보다 그들의 정서에 맞는 작업방식을 제각기 택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하학적 경향을 최초로 띠면서도 서정적이거나 심지어는 앵포르멜의 잔재를 철저하게 거부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동인

p.74-75 한국의 1960년대 후반은 미술사적, 사회사적 측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한국의 실험미술은 국외의 다양한 미술현상과 가장 밀접하게 그리고 다층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던 무렵이고 주목하여 분석해야 할 요소들이 풍부히 잠재해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의 앵포르멜이나 단색조 회화의 내적 특징을 보는 시각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보아야 할 미술의 양상도 있었다.

<청년작가연립전>은 침체되었던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띠게 해주었던 요체로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오광수/한국현대미술사.p.198) 이후에 전개되는 1970년대 단색조 회화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성격에 비한다면, 군소적 움직임 중 하나이거나 동문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일시적 단기현상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실험적 오브제와 해프닝이 지속적으로 행해지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와 사회적 반영의 측면으로 해석되는 것이 꺼려졌던 이유를, 실험미술이 한국의 사회현실 속에서 실험미술이 억압되었다는 측면에서 찾고 싶다. 실제로 나는 <청년작가연립전>을 시발점으로 해서 이후에 시도되었던 여러 실험적 전시와 해프닝들은 당국의 심한 견제를 받았으며, 심지어 작가들이 경찰서나 소위 안가에 끌려가기도 했다는 증언을 새로이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실험미술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이들이 자신의 실험예술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고, 사회에 소극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작가연립전>은 서구 및 일본의 전위 미술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의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사회발언을 잠정적으로나마 표출하고 한국인으로서 개개인이 내놓을 수 있는 특유의 모티브를 찾아내어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최근 국내미술의 다양하고 다층적인 움직임들, 오브제, 설치미술과 해프닝들은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시도했었던 실험미술들의 후예다. 그것은 앵포르멜과 단색조 회화에 비해 비주류가 아니라, 공존의 의미를 던져주는 실험의식들이었다.

 

3) 1960년대 말 확산되는 해프닝과 실험적 태도들

한국의 실험미술가들이 서구나 일본의 새로운 미술경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는 주로 『미술수첩』이나 『미즈에』같은 일본의 미술잡지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무동인전>이나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시도한 입체 설치 작업과 해프닝들은 실험미술가들에 읳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의욕적으로 전개되었다.

 


4/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유신체제의 실험미술

4-1. 4공화국의 유신과 포크송의 시대

4-2. 4집단과 그 주변

p.124-127 참여문학이나 저항가요 못지 않게 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이나 해프닝에 대한 유신시대의 경직된 편견은 늘 실험미술의 현장에 경찰이 동원되어 감시를 받는 현상을 낳았다. …’무체사상이란 이념 아래 모인 이들은 통령을 김구림이, 총령을 정찬승, 포령을 방태수, 의령을 손일광이 맡았다. 노장사상의 무위 정치론에서 가져왔다는 이 사상은 정신과 물질의 분리를 지양하고 일체화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일체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음악, 영화, 연극 ,미술, 무용, 문학 등이 종합된 어떤 새로운 예술형태를 추구. 이무렵 통령(회장)김구림은 단순히 서구의 현대미술 경향을 시도해보는 것에서 나아가 제4집단을 결성함으로써 시대성을 인식하고 한구군화의 독립적 가능성과 주체성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것은 한국의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현실인식에 기초를 둔 실험미술의 참여의지이자 실험미술이 한국의 주체적 문화를 확립시켜 세계 속에서 그 위상을 찾게 하겠다는 자기표명이었다.

4집단은 묵은 예술형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예술과 삶을 확립코자 하는 취지를 가졌으나 극단 에저또가 가담해 퍼포먼스가 주류를 이루었던 이 운동은 멤버들이 발언하고자 하는 내용이 반정부적으로 해석되는 바람에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얼마되지 않아 결국 해체를 당하고 말앗다….이후 예술 내에서 순수하게 시간성의 문제를 다루는 개념미술의 경향으로 선회하기도 하였다.

 

3. 그룹전을 통한 사회 발언

p.145-196 실제로 1967-1970년 해프닝을 비롯한 소집단의 실험적 분위기가 앵포르멜에 대한 하나의 반동적 방향이었다면, 또 하나의 반동은 1968년 조선일보 주체 제12 <현대작가초대전>에서 보였던 것처럼 옵아트와 기하학적 경향의 작품들의 집단적 움직임이었다…. 당시 이우환은 이 전시와 관련된 좌담회에서 한국현대미술에는 오프적 경향이 강하나 그것이 논리적으로 취급되어진 것은 아니고 비상히 단순한 색을 좋아하는 민족적인 기호가 예전부터 잘 음미되어져 왔기 때문이며 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추구해간다면 한국적인 특수한 양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 앵포르멜 이후 1968-1970년경 잠시 옵아트 및 기하학적 추상계열로 기우는 듯 하던 국내전 및 해외전 출품의 동향은 곧바로 일본의 모노하를 연상시키는 입체물들로 급선회하는데, 이는 재일 작가 이우환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후 AG, ST, 등의 그룹소개)

 

 

6/공존 의미-경계를 넘어

1960-1970년대 한국은 유례없이 발전적인 격동기이자 암흑기였다. … 그러나 나는 어떤 시대이든 예술이 사회와 전혀 괴리될 수는 없다는 입장에서 출발해 특히 격동적이었든 1960-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예술과 사회가 소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보고자 했으며 한국의 실험미술에서 그 가능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해석의 방향에 따라 격동기의 한국사회에서 실험미술의 위상을 충분히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현재 진행 중인 수많은 전위적 작업들의 기원을 1960-1970년대의 실험미술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이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현상과 외형적으로 유사한 조형적 형태를 띠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던 격동기 한국의 사회상황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암암리에 그것이 작품 속에서 투영되었다고 여겨지지만 이점은 이제까지 상세하게 연구되지 못해왔다. … 뿐만 아니라 앵포르멜과 단색조회화에 대한 관심도에 비하면 이들의 작업은 거의 무시되다시피 했으므로 그들의 작품을 확인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중요한 것은 1960-1970년대 한국에서는 그 어느 나라와도 유사하지 않은 독특하고도 모순된 사회현상이 잇달아 전개되어, 비약적인 경제발전이라는 문명의 긍정적 측면과 유신시대의 정치적 퇴행 및 사상,문화의 부정적 정체상태를 양면으로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에 예술을 위한 예술만이 중점즉=적으로 다뤄진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나는 거의 소실될 뻔했던 소수의 실험미술가들의 작업을 찾아내고, 나아가 그들의 작업에서 당시의 양면적인 사회 현상을 읽어내 예술을 위한 예술과 더불어 사회와 소통하는 미술을 한 시대에 공존시키고자 했다. 1960-1970년대 실험미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에서 미처 의식하지도 못한 채 나타냈던 시대와 사회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은 한국의 현대미술의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구상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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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전환과 역동의 시대>, 2001

- 현시대에 와서 다시 살펴보는, 이 시대(1960-1970)를 규정하는 제도권의 논리

- 앵포르멜 (     ) 단색조회화 

  ------------------------>이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시선

- 한국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어진 움직임

- 한국현대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