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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text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신경숙/문학동네


  팔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냥 흘러가는 법 또한 없다. 팔 년 만에 전화를 걸려온 그에게 어디야? 하고 담담하게 묻는 순간, 이제 내 마음속엔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격렬한 감정을 숨기느라 잘 지내고 있는 시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정말 담당하게 그에게 어디야? 하고 묻고 있었으니까. 의문과 슬픔을 품은 채 나를 무작정 걷게 하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쓰라린 마음들은. 혼자 있을 때면 창을 든 사냥꾼처럼 내 마음을 들쑤셔대던 아픔들은 다 어디로 스며들고 버려졌기에 나는 이렇게 견딜 만해졌을까. 이것이 인생인가.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때문인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휘말려 헤어나올 길 없는 것 같았을 때 지금은 잊은 그 누군가 해줬던 마라. 지금이 지나면 또다른 시간이 온다고 했던 그 말은 이렇게 증명되기도 하나보다. 이 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가장 큰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지금 충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모두 적절한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견딜 힘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겸손할 힘을 줄 테니까.


프롤로그 p 10-11


  스무 살의 나는 매일 아침 저만큼 학교의 정문을 바라보며 학교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학교를 향해 올라갔던 언덕길을 다시 내려오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때의 심정을 정확히 뭐가 어째서라고 집어낼 수가 없다. 열아홉의 마지막과 스물의 초입 삼 개월을 갓 결혼한 사촌언니의 신혼집 구석방 창에 검은 도화지를 붙여놓고 지냈다. 종이 한 장을 붙였을 뿐인데 방안은 낮도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 어둠 속에 불을 켜놓고 밤이나 낮이나 책을 읽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어째서라기보다 달리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책 한 권에 단편소설들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스무 편 넘게 수록되어 있는 문학전집을 순서대로 육십 권을 읽고 나니 창밖은 삼월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일이다. 신혼집에 늘 밤처럼 어두운 방이 있었다니. 그 방에서 나온 건 대학의 입학식에 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도시에서 그처럼 자유로운 공간에 처음 놓여졌다. 지금 윤교수는 병실에 있고, 그는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고, 또 어떤 이는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때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나날들을 통과해나왓을지.

프롤로그 p 21-22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나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 일이 나이먹는 일과 비례하는 건 아니다. 세월이 쌓인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내게는 오히려 청춘 시절보다 지금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더 서툴고, 느닷없이 찾아드는 죽음의 소식에 매번 당황하며 휘둘리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그리고 어느날엔가는 눈 내리는 새벽에 이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다가 가만히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싶다. 그게 지상에서의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한다.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을 들어낼 때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기척들을 물리치고 나는 끝내 책상을 말끔히 정리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 비누질을 여러 번 해 세수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나도 모르게 책상 쪽을 돌아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프롤로기 p 26


1. 이별
  내가 스물한 살에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면서 나 자신과 약속한 것은 다섯 가지였다.


  책을 다시 읽을 것.
  책을 읽을 때마다 발견한 새로운 단어와 그 뜻을 노트에 적어 개인사전을 만들 것.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외울 것
  추석 때까지는 엄마 묘소에 가지 말 것.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걸을 것.


p 27


  사이클은 내가 이 도시로 나올 때 단이가 나에게 준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까지 가지고 사라졌다. 내가 이 도시로 떠나오기 전 어느 날 밤 단이는 대문 밖으로 나를 불러냈다. 그곳에서 함께 성장한 우리는 우리의 발자국이 수십만 개는 찍혀 있을 어둠 속의 골목을 빠져나와 외곽의 벌판 쪽으로 걸어나갔다. 철길을 앞에 두고 나란히 벌판에 앉았다. 밤기차가 철거덕철거덕 소리를 내며 우리 앞을 지나갔다. 기차의 객실마다 켜진 불빛이 환하디환했다. 철거덕거리는 소리만 아니었으면 불 켜진 유리창이 빠른 속도로 어둠 속을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단이는 뭔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 우리 대학에 꼭 가자.
  - ......
  - 난 그림을 그릴 거야.
  - ......
  뭔가 벅찬 기분이었다. 들판에서 밤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희망을 데리고 먼 시간 속으로 먼저 출발하는 듯했다. 헤어질 무렵에 단이는 내게 문고판 시집을 한 권 주었다. 자기가 요즘 열심히 읽은 시집이라고 했다. 다 읽었으니 내게 주는 거라고. 어둠 속이라 시집의 제목도 잘 보이지 않았다.

(중략)

  에멜리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를 다 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아껴가며 다섯 번은 넘게 읽은 후에 나는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종로의 대형 서점으로 나갔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꽉 잡은 채로. 이 도시에서 내가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책은 [말테의 수기]였다.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내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줫던 단이가 그 책 맨 앞장에 써놓은 제목이라는 이유로 선택한 책이었다. 서점에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닫혀 있는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첫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 눈에서 집을 떠나올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나도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 든 사람 중의 하나일까? 나 자신을 향해 질문을 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이 도시는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높은 빌딩과 수많은 집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거나 손을 잡을 사람은 없었다. 넓고 좁은 길이 너무 많아서 자주 길을 잃게 만들었다. 나도 이 도시의 사람들과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만나도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지며 나는 어린 실향민이 되었다.

p 33-34

  엄마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죽음을 미안해 했다.

p 36

  고등학교 때 사진반 서클활동을 했었다. 우연히 롤랑 바르트의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새싹을 하나씩 나누어주는 것이다, 라는 문장이 씌어 있었다. 창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후에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한 글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밝은 방]을 읽다보니 사진이 찍고 싶어졌다. 집에 아버지의 카메라가 있었다. 아버지가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건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따금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할아버지가 목욕탕만 물려주지 않았으면 사진 찍는 사람이 되어 이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사용해보고픈 마음이 발동했다. 막상 사진반에 들어가니 배울 게 없었다. 롤랑 바르트를 통해 알게 된 스투디움이니 풍크툼이니 하는 말을 알고 있는 이가 전무했다. 거기엔 롤랑 바르트라는 이름 자체를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그만 모임이 지겨워졌다. 어느 날, 사진반 선생이 인물사진 찍는 법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몸이 뒤틀려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 몰래 교실을 빠져나오려는데 선생이 이명서! 하고 불러세웠다. 어디 가냐고 물었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선생이 어디가 아픈데? 다시 물었다. 몸이 아팠던 것도 병원에 가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클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어디가 아프냐고! 선생이 다시 물었다. 대답이 궁했다. 우물쭈물하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내 치기 어린 답변에 나조차도 어이가 없었다. 이건 완전 웃엄거리가 되겠군, 생각했다. 운동장 열 바퀴나 스무 바퀴 감이군. 사진반을 담당하던 선생은 과학선생이었다. 수업시간에 거슬리는 학생이 있으면 포복을 시키는 건 보통이고 엉덩이를 내리치거나 되약볕 내리쬐는 시간을 골라 운동장을 지칠 때까지 돌게 했다. 체념하고 불호령을 각오하고 있는데 선생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마음이 아프다구? 선생이 안경 너머로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다. 어서 다녀오너라. 다음 시간에 늦지 말구.

  혼자 학교를 빠져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거기 주인이 없을 것 같은 무덤 위에 누워서 하얀 뭉게구름이 섬처럼 떠다니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얼른 다시 서클로 돌아왔다. 이 후에 한번도 그 서클에 나가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항상 내 성적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과학공부에 몰두하기까지 했다. 학교 뒷산의 묘지에 올라 하늘에 떠가는 하얀 뭉게구름을 바라보다 내려왔던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카메라를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주었을 것이다.

p 51-52



2. 물을 건너는 사람
  어느 날인가 비행에서 돌아온 사촌언니 남편이 저녁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몸살을 앓았다. 굴비를 구워 식탁에 내려놓고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촌언니에게 그는 염려 말라고 했다. 비행기가 너무 빨라 몸이 먼저 집에 왔을 뿐이라고. 영혼이 비행기의 속도를 따르지 못해 지금 돌아오고 잇는 중이라 몸살을 앓는 것일 뿐이니 영혼이 뒤따라 도착하면 나을 거라고.

p 74



3. 우.리.는.숨.을.쉰.다.
  처음엔 그 낯선 터널 위의 마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걷느라 걸음이 더뎠다. 곧 그 마을을 십여 분 만에 빠져나올 만큼 친숙해졌다. 나중엔 내가 그 길에 있지 않아도 그 길이 나와 함께 잇었다. 비가 내리면 담장 위에 올려놓았던 채반을 안으로 들여다놨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 길을 지나는 소녀들과 인사를 나누는 소소한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웃통을 벗고 땀을 흘리며 시멘트를 개고 있는 남자의 윗몸에 나 있는 러닝셔츠 자국이 힘겨운 노동을 상기시켜 고개를 숙이게도 했다. 학교에서 옥탑방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는 오 분가량만 돌면 헌책방들이 나란히 줄서 있는 길을 통과해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길은 지하도를 건너서 야구경기장을 빙 돌아가야 했지만 나는 그 길을 택해 걸었다. 산더미만큼 쌓여 있는 헌책들을 보며 걷다가 쪼그리고 앉아 맨 밑에 깔려 있는 책 제목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 길과 친해졌을 땐 이 도시의 길을 처음 걷기 시작할 때 가졌던, 가출해서 떠도는 것 같았던 감정상태가 누그러져 있기도 했다.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된다


p 88, 89


  우리는 굳게 문을 닫은 신문 가판대 앞을 지났다.
  -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윤교수처럼 중얼거렸다.
  - 너는 무엇을 하고 싶어, 정윤?
  가방 속의 우.리.는.숨.을.쉰.다, 를 떠올렸다.
  -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나는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 그러면 어떻게 될까?
  - 지금의 우리 얼굴이 노인의 얼굴이겠지.
  그의 늙은 얼굴도 나의 늙은 얼굴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 대의 버스도 보이지 않는 버스정류장 앞을 지났다.
  - 그렇지 않아?
  그가 나에게 부질없는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 가장 젊은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고 가장 늙은 얼굴로 지금 이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그건 괜찮아?
  그가 문 닫힌 주얼리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 그 생각은 못 해봤어.
  나도 인생의 끝에 청춘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못 해봤다. 나는 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
  말을 뱉어놓고 보니 단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다시 윤미루의 얼굴도.
  - 못 견디니까 바리케이드를 치고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고 도망치고 붙잡히고 끌려가고 하는 거겠지.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런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계속된다는 거야. 작년이나 올해나 달라진 것 없이.
  - ......
  - 너무 비슷해서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아.
  - 어떻게 되길 바라는데?
  - 무엇이든 좀 달라지기를.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하지 않으니까 무기력해져. 책들이라도 누가 다 훔쳐가 도서관에조차 책이 단 한 권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저 있어. 학교가 폐쇄되어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라도 했으면. 똑같아. 등장인물만 바뀌며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이야. 친구들과 불뿔이 흩어지고 쫓기고 반항하고 또 쫓기고...... 서로 벽을 보며 외롭다고 몸부림쳐. 돌아앉으면 될 텐데 벽을 본 채로 말이야. 이런시간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암담해. 지난봄에도 똑같이 이러고 있었으니까.
  - ......
  -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작년의 오늘과 지금의 오늘을 구별하지 못했을 거야.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정윤...... 오늘을 잊지 말자, 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정윤...... 오늘을 잊지 말자, 고 말하는 그의 얼굴을.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오늘을 잊지 말자, 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가 느끼는 무력감은 나의 것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 무력감을 물리쳐보려고 이 도심에서 서로를 발견한 것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목을 두르고 있던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그의 뱜을 시작으로 이마를 코를 인중을 입술을 턱을 귀를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꿈틀거리는 눈썹을. 그는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내가 눈을 만질 땐 앞으로 나아가기가 불편한지 잠깐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 윤아.
  그가 나를 정윤이라 부르지 않고 윤이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 ......
  - 네가 거리에 나와 있을 줄은 몰랐어. 오늘은 우리 쪽도 진압하는 쪽도 아주 거칠었어. 무리를 잃어버려 두려워하고 있는 참인데 눈앞에 너가 서 있는 거야. 정말 너일 줄은..... 눈을 부비고 다시 볼 만큼 깜짝 놀랐어. 정말 너일 줄은...... 왜 여기 나온 거야?
  그가 침울하게 물었다.
  -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집까지 가장 멀리 돌아서 가려고 했던 게 이리 되었어.
  나는 그의 등에서 내 빈방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타자기를 생각했다. 탁탁탁...... 소리가 음악소리처럼 잠깐 귀에 머물렀다.


p 106-109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해준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비밀을 털어놓은 적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소중했던 비밀이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다른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p 112


어찌 된 셈인지는 모르나 집주인이 세든 사람들만 남겨놓고 이사를 했었다. 그 빈집에 홀로 남아 있던 회색 고양이. 사촌언니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가져다주곤 했다. 왜 혼자 남아 있을까? 궁금해 물으니 사촌언니는 고양이는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공간을 따르는 성질이라 그래, 했었다. 빈집에 고양이가 많은 것도 그래서야, 라고.

p 124




5. 함께 길을 갔네

  낙산에서 내가 사는 옥탑방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홀로 떨어져 있는 내게 다가왔다. 내 귓가 가까이에서 그가 혼잣말하 듯 말했다.
  - 좋아해, 정윤.
  그의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옥탑방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 윤미루만큼?
  그가 내가 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대답했다.
  - 내 십 년 후를 생각할 때만큼.
  - 윤미루만큼?
  시창작 시간이면 맨 앞에 앉아 윤교수의 시선이 움직이는 대로 똑같이 따라다녀 지구의란 별명을 가지게 된 현태 옆에 서서 걷고 잇는 윤미루를 바라보았다. 윤미루의 플레어 치마가 낙산의 화강암을 가만 덮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 어렸을 때 형들이랑 함께 외가에 간 적 잇어. 밤에 형들이 어딘가로 몰려가기에 나도 따라나섰어. 형들은 외사촌형과 함께 참새를 잡으로 가는 중이었어. 나는 참새들이 초가지붕 속에서 살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 내 위의 형이 플래시를 비출 때 오들오들 떨던 참새가 지금도 생각나. 웬 참새들이 그렇게 많았는지. 형들은 불빛을 받으며 파르르 떠는 참새들을 잡아 양손에 쥐고 있었지. 다섯 마리를 한꺼번에 쥐고 있는 형도 있었어. 참새들은 형들의 손아귀에서 꼼짝 못했어. 나중엔 손이 모자랐어. 형이 짚 속에서 꺼낸 어린 참새 한 마리를 보더니 내 손에 쥐여주며 가지고 있어라, 했어. 어둠 속에서 내 손에 쥐여진 어린 참새는 놀라서 파닥거리지도 못하고 잔뜩 움츠리고 있었어. 어찌나 따뜻하고 보드랍던지. 나는 참새가 날아갈까봐 슬몃 주머니에 넣었어. 손을 집어넣어 주머니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참새를 가만가만 만져봤지. 손끝에 닿는 참새의 새털 감촉이란 체온이 정말 좋았어. 아마도 내가 살아 있는 것들 중의 어린 것을 그렇게 만져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걸. 내 작은 주머니에 꾸물거리는 생명이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어. 온 세상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어. 몇살 때였는지 가물가물한데 그 기쁨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때의 그 기쁨만큼.
  그.때.의.그.기.쁨.만.큼, 이라는 말이 나의 마음속에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나는 성벽에 손을 짚고 저만큼 앞서 걸어가고 있는 윤미루의 플레어 치마를 다시 바라봤다.
  - 윤미루만큼?
  - 형들이 참새잡이에 빠져 있는 중인데 외사촌형이 내게 좀 전에 가지고 있으라고 했던 참새를 달라고 했어. 건네주고 싶지 않았지만 주머니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참새를 어둠 속에서 꺼냈어. 보고 싶기도 했거든. 정말 작았어. 아직 날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 외 사촌형이 내 손바닥 위의 참새를 집어들고 어딘가로 갔어. 그대 주머니 속에서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참 만에 외사촌형이 다시 돌아왔을 땐 참새들이 까맣게 태워져 있었어. 뼈들이 오돌토돌 튀어나와 있었지. 방금 전까지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따뜻한 참새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알 도리가 없었어. 털은 다 타버리고 형체를 그대로 드러낸 그을린 참새들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어. 내 참새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어. 내가 계속 내 참새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대니까 귀찮았는지 외사촌형이 그중 가장 작은 것을 내게 내밀며 이거야, 짓궂게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어. 까맣게 그을린 어린 참새를 손에 받아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그 보드랍고 다뜻했던 참새는 차갑게 변해 있었어. 내가 죽은 것을 처음으로 손에 쥐어본 순간이었어. 그때의 그 슬픔만큼.
  그.때.의.그.슬.픔.만.큼, 이라는 말이 또 내 마음에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며 또 말했다.
  - 윤미루만큼?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 점점 진지해져 기분이 야릇했다. 내가 무엇을 확인하려 하는지 나도 모르겟는 기분이었다.
  - 이 도시에 나와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야. 삼월이었는데 눈이 퍼붓던 날이었어. 한 친구의 학교 앞에서 일고여덟 명이 함께 만났는데, 새벽이 되도록 헤어지질 못하고 이 도시를 장소를 바꿔가며 배회했어. 남대문시장 안을 지나게 되었을 때는 늦은 밤이었어. 포장마차 안에 참새구이가 죽 놓여 있었어. 추위에 떨면서 술값을 모아 술과 안주를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참새구이를 시키자고 했어. 참새구이? 모두들 반가워했지. 우리들 중에 참새구이를 안 먹어본 놈은 나뿐이었어. 내가 떨떠름하게 참새구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참기름을 발라야 한다느니 소금만 뿌려야 한다느니 진짜는 숯불에 구워야 한다느니 야다니었어. 그물로 참새를 잡을 때는 어째야 한다느니 참새는 엽총을 쏴서 잡을 때가 최고라느니, 쌀을 술에 담갔다가 참새가 다니는 곳에 뿌려놓고 한 시간 쯤 지나 술 취한 참새가 자고 있을 때 집어오면 된다는 놈도 있었어. 마치 이 세상엔 참새를 잡아서 구이를 해먹어본 자와 아닌 자면 있는 것 같았지. 그사이 기름이 발라진 참새가 석쇠 속에서 구워져 우리 앞에 놓였어. 털이 벗겨지고 내장이 다 떼어내져 납작했는데 머리통은 그대로 붙어 있었지.. 참 기이한 느낌이었어. 모두들 한 마리씩 들고 먹기 시작했지. 그 작은 참새 머리통에 금이 가 있었어. 내가 그걸 쳐다보고만 있으니까 너도 먹어보라고 하나 둘 참견하기 시작했어. 뭐야? 여기서 철학해? 합류하지 않는 나를 질책하는 기이한 분위기로 흘러갔지. 참새를 씹어먹고 있는 놈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어. 언제까지 니가 버티나 보자, 하는 거 같았지. 눈이 내리는 왁자한 시장통에서 금이 간 머리통이 달린 참새를 집었지. 무슨 오기였을까. 피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머리통 쪽을 어금니로 깨물었어. 내 입안에서 새의 머리통이 오도독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지...... 그때의 그 절망만큼.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가. 나는 성벽에 대고 있던 손을 거두고 일행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았다. 그를 향해 돌아섰다.
  - 오늘을 잊지 말자, 이 말을 하려고 그랬지?
  그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지고 곧 입가에 쑥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가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나는 손을 빼서 그의 손을 더 힘껏 쥐었다. 오늘을 잊지 말자, 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적해져 있었다. 상실될 걸 알고 있는 이의 고독이 묻어 있었다. 십년 후, 이십 년 후...... 그때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마음이 복잡해져 나는 그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그가 손을 빼더니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p 154-158



갈색노트8

  나는 곧 아이를 낳아요. 윤의 사촌언니가 두 손을 다시 배 위에 얹어놓았다. 공손한 움직임이었다. 윤이 옆에 있어주고 싶지만 상황이 그리 될 것 같지 않아 명서 학생을 찾아왔어요.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았는데다 통화가 잘 되지 않아서 이리 늦어졌어요. 오늘 아침 통화가 되자마자 마음이 급해 빨리 만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네요. 내가 윤이랑 명서 학생보다는 이 세상을 조금 더 살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된다면,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생각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라고 생각해요. 만나고 안 만나고는 상관없이 윤이와 단이는 서로 생각하는 것으로 끊어지지 않는 관계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어느새 윤의 사촌언니에게 간절하게 묻고 있었다. 함께 있어줘요. 언제나 함께...... 윤이에게서 눈길을 데지 말아줘요. 내가 말했다. 그건 제게 힘이 되는 것이라고. 윤의 사촌언니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 딱딱한 얼굴로 앞만 보고 얘기하던 그녀가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기미 낀 뺨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사촌언니의 깊은 눈이 내 얼굴을 떠돌았다. 안심이에요.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 당황스러웠죠? 아닙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심이었다.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윤의 사촌언니만 아니라면 그만 실례합니다, 라고 말하고 당장 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p 286-287


9. 모르는 사람 백 명을 껴안고 나면


  나의 제자들에게.
  소식을 들었겠지만 나는 내가 오래전부터 일해왔던 이 학교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는 시대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내 건강이 더이상 내가 교단에 서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어서입니다. 이미 총장 앞으로는 사직서를 써서 보냈고 별도로 재단 이사회 앞으로도 간략한 편지를 써서 보낸 후 차분히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생업으로 알고 봉직해온 일터를 떠나면서 여러 가지 느낌과 생각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눈길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나의 동료들이나 가족의 시선과는 다른 각도에서 내 마음을 압박합니다. 내가 좀더 버텨주기를, 아니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촉구하는 무언의 부탁과 질책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평생 말을 다루고 말과 사우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시인인 나에게 지금 이 시대는 시련의 연속입니다. 말이 제 값어치를 잃어버린 시대, 그리하여 온갖 부황하고 폭력적인 말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나는 더이상 말에 대한 말을 하는 것에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말에 대한 이 절망이 인생에서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교단에서 물러나지만 최선을 다해 살 것이며 건강을 돌볼 것이며 무엇보다 그동안 중단한 시를 쓸 것입니다. 그것을 나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시국에 대한 항의와 표시로 사표를 던지 투사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허무주의적으로 모든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혼자 고결함을 찾아가는 은둔자도 아닙니다. 비록 학교를 떠나지만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며 비록 이 시대의 거친 언어에 좌절했지만 계속 시를 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학교를 떠나기로 한 나의 결정을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여러분과 만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주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종종 들려주었던 물을 건너는 인물 크리스토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 289-291


  - 어린 시절을 보낸 집에 우물이 있었어. 그 우물 속의 물이 내 기억 속의 최초의 물이야.
  내가 갑자기 우물 얘기를 꺼내자 그가 우물? 하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카시아나무는 그 숲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타워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어디선가 날아온 꽃잎들이 그가 바라보는 허공을 떠다니다가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 그 집에서의 하루는 그 우물에서부터 시작되었어. 엄마가 신새벽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리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지. 아버지와 나도 그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어. 이제는 그 시골 마을도 수돗물을 사용해. 우물은 덮개로 덮여 있어. 그 집에 가게 되면 덮개를 걷어내고 우물 속을 들여다봐. 아직도 저 깊은 우물 속에 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어.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기버. 내가 본 최초의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게 안심이 돼.
  - ......
  - 그 물을 들여다볼 때만큼 너를 좋아해.
  나의 느닷없는 말에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예전에 성곽길을 걷다가 그가 참새 이야기를 할 때를 내가 따라하고 잇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풋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집집마다 우물물을 쓰던 때는 물이 집 바깥으로 흘러나갈 수 있도록 마당의 땅 밑으로 하수관을 연결시켜놓았지. 언제나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났어. 집집에서 흘러나온 우물물들이 대문 바깥에서 만나곤 했어. 대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그 물길이 보였어. 작은 도랑같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했어. 그 물 덕분에 골목의 물길 가까이엔 봄이 오면 수선화같이 생긴 노란 꽃들이 꽃대를 뚫고 피어났어. 꽃이 지고 나면 푸른 줄기들이 무성하게 군락을 이뤘어. 골목길엔 겨울만 빼면 항상 노란꽃이나 푸른 잎들이 출렁거렸어.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가장 가운뎃집이었어. 우리집에서 흘러나가는 물길이 그 도랑의 시작이었던 셈이야. 물을 따라 나가면 작은 도랑에서 다른 곳에서 흘러나온 물과 합쳐졌어. 그 물을 따라가면 다시 큰 도랑에서 물들이 합쳐져서 농수로로 흘러들었어. 집집에서 흘러 나온 물이니 더러웠을 거라도 생각하면 오해야. 우물의 물은 대개가 길어다 부엌에서 썼거든. 우물에서 하는 일은 세수하는 일, 채소 씻는 일 같은 거여서 맑은 물이야. 보기에는 허술해 보이는 물길인데 여름날 장맛비도 잘 실어날랐어. 가끔 말이야, 그 물들이 어디까지 흘러가나 궁금해서 그 물길을 따라가봤어. 들판을 건너게 되고 철길을 건너게 되고 그러고도 또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과 마주치게 되곤 했어.
  - ......
  - 그 끝없는 물길만큼 좋아해.
  큰 도랑의 물은 또 어디서 시작되나 싶어 도랑 위의 둑을 따라가 볼 대도 있었다. 끝도 없었다. 그 마을의 어디를 가든 혼자가 아니었다. 늘 단이가 있었다. 단이와 함께 그 물을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윗도랑이라도 불렀던 곳에 이르게 되었다. 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큰 도랑의 물이 솟아나오는 곳을 들여다보면 어둠뿐인 긴 수로가 놓여 있었다. 그 속에서 물은 쉴새없이 솟아나왔다. 우리는 수로에 가로막혀 물이 어디서부터 흘러오는지 더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물은 마을 마을을 지나면서 빨래터가 되고 논둑을 지나면서는 농수로가 되며 끝없이 흘러갔다. 물에 떠내려간 운동화 한 짝을 찾기 위해 아래로 흐르는 물을 따라가다가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는 물길에 좌절해 돌아오면서 훌쩍거리던 기억. 대문을 나서면서부터 들려오는 물소리였지만 그 물길의 시작이 어디인지 그 물길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흘러간다는 것 밖에는.
  (중략)

  - 언젠가 말이야, 처마에서 흘러내리는 봄비를 함께 받아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언젠가?
  - 응......언젠가.
  다가올 언젠가가 아니라 지나간 언젠가 봄비 내리는 날 세숫대야를처마 밑에 내다놓고 봄비를 받던 단이와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야에 봄비가 넘치면 장미 밑이나 감나무 밑에 부어주곤 했던 단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살아나게 했던 봄비. 단이와 나는 봄이 되어 나무에 물이 오른다......라는 말을 금세 이해했다. 단이와 나는 그 물이 오르는 순간을 확인해보려고 봄이 오기도 전에 관히 나무 옆에 서서 나무를 긁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 얼굴에서 갑자기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p292-295


10. 우리가 불 속에서

  그와 나는 학교를 빠져나와 윤교수의 시골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종로 3가까지 걸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찬바람이 느껴질 적마다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내가 두르고있는 목도리를 여며주었다. 두 손바닥을 비벼서 따뜻해지면 내 뺨을 감싸주었다. 우리가 청량리에서 버스를 내려 다시 덕소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맨 뒤에 앉았을 때 눈발이 희끗희끗 비치기 시작했다. 그가 공허한 목소리로 어서 세월이 많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정윤, 하고 말했다. 용서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 아주 힘센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p 331-332



에필로그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 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p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