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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text

원더보이/김연수

원더보이/김연수




p.93

그러고 나서 마스터 피터 잭슨은 전생을, 그러니까 여러 번의 삶을 기억하는 소년들을 찾아서 스리랑카로 돌아갔다. 그의 생각을 복사하듯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도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빠의 몸이 죽었기 때문에 슬펐던 것이지, 영혼이 죽었다고 내가 운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영혼은 무수히 많지만 몸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빠의 몸이 더욱 그리웠다. 만질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꼬집을 수 있고, 간질일 수 있는 그런 몸이.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인 것이었다. 내게는 아빠가 필요했다.


p.97~100

그 겨울 내내 고문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고문당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 고통이 절정에 이를 때, 그들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고통도 자신을 완전히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차례로 발견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저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기쁨의 순간들을. 자기가 개나 돼지 혹은 곤충이나 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들을. 가슴이 터지도록 누군가를 꽉 껴안아 다른 인간의 심장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을, 흡족할 정도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배가 아프도록 웃던 순간을, 단풍이 든 산길을 걸어다니고 쌓인 눈을 밟고 초여름의 밤바다에 뛰어들고 공원 벤치에 누워 초승달을 바라보던 순간을, 그들은 죽어가면서 떠올렸다. 그게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들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떠올리는 것. 그런 순간에도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읽었다. 나는 아파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또 침을 흘리고, 고통 속에서 몸부름치다가, 다시 눈을 번쩍 뜨고는 말도 안 되는 삶의 환희에 웃음을 지었다.


...

"군은 인간에 대해 아직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 가장 강해지는가? 적의 가장 약한 부분을 타격할 때다. 그럼 가장 약한 부분은 어디인가? 애착하는 것들이다. 사랑 따위, 간절함이나 소망 같은 것들.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믿는 것과 소망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들을 빼앗으면 인간은 한없이 약해진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것을 빼앗으면 인간으로서의 삶은 그 순간 끝난다...."


p.118~121

그날의 그 밤처럼 이따금 아빠는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천천히 숨을 쉬면서 아빠는 뭔가를 생각했다. 아마도 전적으로 불가능한 풍경을 떠올리려고 애썼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떠올린 것들을 아빠는 수첩에 적곤 했다. 무엇을 적느냐고 물으면 아빠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기록한다고 대답했다. 기억하지 않으면, 혹은 기록하지 않으면 인생의 모든 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듯이. 너무나 자잘한 것들이어서 잊지 않는다고 해도 그 쓰임새를 알기 힘든 일들까지도. 아침 아홉시마다 육안으로 관찰한 날씨, 신문에서 옮겨적은 최고기온과 최저기온과 풍향과 풍속, 세계 각구의 헤드라인 뉴스, 아침과 점심으로 먹은 음식과 반찬 들, 십원 단위까지 적는 소소한 지출 내역들... ...

  쓸모를 알기 힘든 건 바람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모호하고 윤곽이 없이 시시때ㄸ로 모양을 바꾸는 상념들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아빠는 그런 생각들을 떠올렸고,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생각일지라도 수첩에 모두 적었다.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그런 몽상과 꿈과 소망을 수첩에 적는 이유가 나는 궁금했다. 그러자 아빠는 과학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를 내게 보여줬다. 기사 옆에는 상자 그림이 있었다. 그 상자 안에는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들어 있다고 했다. 출세한 동기생을 소개하듯 아빠는 청산가리가 얼마나 우수한 독극물인지 내게 설명했다. 뿌듯한 표정으로 아빠는 "일 그램만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지"라고 말했다. ...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요?"

내가 항의했다. 그러자 아빠가 대답했다.

"양자론의 세계니까."

  그 말이 얼마나 멋지게 들리던지. 양자론의 세계란 과연 어떤 세계이기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내가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그런 상태로, 즉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산 상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관찰이다."

  아빠가 기사를 읽었다. 그 말이 얼마나 신기하게 들리던지. 꼭 새 발명품의 작동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p.176~177

여름밤, 은행나무 아래에서의 다짐


  서울역 플랫폼에 내려 출구로 나가기 위해 지하도 입구에 섰을 때, 범람한 강물처럼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의 모습은 내 눈을 압도했다. 내게 다시 돌아온 서울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소망과 희로애락이 거미줄처럼 서로 뒤엉켜 한데 출렁이는 대양과 같았다. 천만 명의 사람들이 도시의 물결치는 삶 속에서도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는 걸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약했지만, 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그들을 억세고 질기게 만들었다. 그 강함의 원천은 기차에서 그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또 운명처럼 재회하고, 자주 그의 얼굴을 떠오리고 그러다가 그를 사랑하고, 화상을 당한 사람처럼 사랑한 흔적을 지우지 못해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려고 기다리며 나는 검거나 하얀 혹은 잿빛의 머리칼들과 모자들과 스카프들과 대머리들과 퍼머머리들을 바라봤다. 그들 모두에게도 그런 이야기 하나쯤은 있으리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도 알겠다. 믿는 것과 소망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것을 빼앗으면 인간으로서의 삶은 그 순간 끝난다던 권대령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그러니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죽음 목숨이나 마차나지였다는 것도 이제 알겠다.


p.217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가을, 열일곱 살의 가을이 찾아왔다. 나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 하늘의 종류는 다양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도 있었고, 구름이 높게 갈려 새하얀 하늘도 있었다. 지붕과 지붕 사이 손바닥만한 하늘도 있었고, 막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고 난 뒤의 텅 빈 하늘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낮은 하늘을 좋아했다. 비가 내리면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빗줄기의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고 듣는 빗소리도 있었고, 바닥에 엎드려 가까이 듣는 빗소리도 있었고, 혼자 자다가 깨면서 듣는 빗소리도 있었다. 처음인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때,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게, 세밀화처럼 선명하게, 해와 달처럼 유일무이하게 내 눈과 코와 입과 귀와 몸에 와 닿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다. 평범해지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기 시작햇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나를 외롭고 가난한 소년으로 만들었다.


p.244

  벚꽃은 왜 그토록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일까?


p.280~284

  우리는 주말에 광화문 네거리에서 다시 만났어. 동아일보사부터 걸어가면서 건물과 간판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노트에 그 이름들을 적었어. 광화문우체국, 스타다스트 호텔, 유정낙지, 르네쌍스 다방, 공안과, 중소기업은행, 보신각, 보신주단, 파인힐, 보금장, 종로서적, 성서회관 등등 종로5가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순서대로 쭉. 그리고 일주일 내내 그와 나는 노트에 적은 이름을 외웠다가 그다음 주말에 만나서 서로 외운 것을 확인했지. 신신백화점 맞은편 파출소까지는 둘 다 잘 외웠지만, 거기서 길을 건너 보신각 앞으로 가면 그때부터 헷갈렸어. 토요일의 종각역 부근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으니까.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의 손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나갔지.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우리가 맞잡은 두 손,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던 그 뼈와 근육과 핏줄 들이 내가 아는 사랑의 거의 전부야. 그것 말고 또 무슨 사랑이 있을까? 다만 그 손을 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 말고. 종로5가까지 걸어갔다가 길을 건너 다시 광화문 쪽으로 돌아왔지. 돌아올 때는 늘 힘이 빠져서 간판을 외우기보다는 각자 자기 이야기를 만히 했어. 그래서 파고다공원 앞을 지날 즈음이면 일주일 동안 기뻤던 일이나 슬펐던 일들도 얘기하고, 자기 꿈도 얘기하고, 가고 싶은 곳도 얘기했어. 아마 그때였나봐, 여름이 되면 둘이서 강릉에 꼭 놀러 가자고 했던 게.

...그가 말했지. 그는 그날 걸어가면서 자기가 외운 것들을 내게 들려줬어. 그건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어. 고통과 피와 눈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지금도 종로 거리를 걷다보면 그때의 우울과 멜랑콜리가, 그다음에는 열에 들떠 자기가 들은 이야기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내게 들려주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뜨거운 여름이었지. 나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 나는 뜨거운 여름 안에 있었지. 그때 나는 영원을 생각하고 있었어. 하늘이나 바다 같은 것, 혹은 시간이나 공간, 우주 같은 것. 어쩌면 사랑 같은 것.


p.305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


p.315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316

아침 햇살이 들지 않는 교육관 로비는 아직 어둑했다. 유리문 밖에서 두 손으로 눈 주위를 감싸고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희선씨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불을 밝혔다. 라이터 불빛이었다.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를 안았다. 뜨거울 수가 있을까. 그토록 뜨거울 수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몸이 그토록 뜨겁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그건 어쩌면 그때 우리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 외젠느 뷔르낭, <부활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