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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아버지/베르나르 베르베르/이세욱옮김/열린책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것,
당신이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듣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당신이 이해하는 것,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의사소통에
여러움을 겪는다.
하지만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면 안된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1부 빠진고리

1. 세 가지 질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14. 새앙쥐와 코끼리 

   그는 뤼크레스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옷과 살갗에서 튀어나오는 빛알갱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빨아들일 것처럼 강렬하였다.
  이 여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엇 때문에 고집스럽게 나를 찾아오는 거지?
  자그마한 체구. 키 1미터 6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50킬로그램 정도. 근육이 발달된 팔. 탱탱한 젖가슴. 에메랄드빛의 생기 있는 눈. 긴 속눈썹. 긴 적갈색 머리. 작고 예쁜 발. 여유롭고 규칙적인 숨결. 민첩한 몸놀림. 안정된 시선. 입 안에 든 껌. 예쁘게 목을 가눈 자세. 저토록 우아한 자태를 지닌 걸 보면 아주 어려서 고전 모용 같은 것을 했음에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로럴과 하디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콤비를 이루겠군> 하고 뤼그레스는 생각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사과 드리러 왔어요. 지난번엔 제가 너무 무례했어요.
  - 나도 무례하긴 마찬가지였어요. 우리 서로 비긴 걸로 합시다.
  - 선배님이 비폭력주의의 신봉자이신 줄 몰랐어요.
  - 그걸 알았다 해서 뭐가 달라지겠소?
  - 비폭력주의자들은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민다잖아요.
  - 그건 구식이에요. 오늘날의 비폭력주의자들은 따귀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죠. 그럼으로써 공격자에게 폭력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조차 갖지 않게 하는겁니다.
  - 제가 선배님을 모욕했어요. 바보, 멍청이, 백치, 숙맥이라고 욕했잖아요.

  카첸버그의 둥근 얼굴에 그 점에 관해서라면 자기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 바보를 뜻하는 프랑스 어 <앵베실 imbecile>이 어디에서 온 말인지 알아요? 라틴어 <임베킬루스 imbecillus>에서 온 거예요. 원래 지팡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약한 사람이 쓰러지지 않으려면 지팡이나 목발 뛰위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빗댄 것입니다. 어떤 교의나 교리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스승에도 기대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용감한 거 아니에요? 나는 바보이기를 바라고 되도록 오랫동안 바보로 남고 싶습니다.

  뤼크레스는 꿈보다 해몽이 일품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내가 멍청이라는 것도 인정해요. 멍청이를 뜻하는 <스튀피드 stupide>라는 말은 라틴 어 <스투피두스 stupidus>에서 왔어요. 원래는 <놀라운 일을 당해서 어리둥절하다>는 뜻이었지요. 그러니까 멍청이는 모든 것에 놀라고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인 셈입니다. 나는 오래도록 멍청이로 남고 싶어요. 백치를 뜻하는 <이디오 idiot>는 그리스어 <이디오테스 idiotes>에서 온 것으로 <특별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디오티슴 idiotisme>이라는 말이 어떤 언어의 고유 어법을 가르킨다는 점을 생각하면, 금방 짐작이 갈 거예요. 결국 백치는 특별한 사람인 셈이고,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래요. 나를 숙맹이라고도 했지요? 숙맥을 뜻하는 프랑스 어의 <콩>은 여성의 생식기를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을 <콩>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을 최상으로 대접하는 거 아닌가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생명의 원천과 그를 연결시키는 것이니까 말이에요. 나는 정말이지 바보, 멍청이, 백치이면서 숙맥이기를 바래요.

  뤼크레스는 바닥에 흩어진 책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 선배님의 삶을 변화시킨 책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무슨 책이죠?
  보아하니 그의 잡동사니 속에 문제의 책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책 더미 쪽으로 곧장 걸어가더니 그 한복판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표지에는 사람들이 지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모헙 소설 같은 인상을 주었다.
  - 아무 서점에나 가도 구할 수 있는 책이에요. 특별한 게 전혀 없어요. 어쩌면 바보 같고 멍청이 같고 백치 같고 숙맥 같은 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 그 말은 이 책이 교조적이지 않고 경이롭고 특별하고 여성적이라는 얘기군요.
  뤼크레스는 그렇게 받아넘기고, 그가 건네 주는 책을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그러는 동안 이지도르 카첸버그는 그 책에 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가 보기에 그 책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두 가지 개념이 담겨 있다고 했다.
  - 첫째는 <최소 폭력의 길>이라는 개념입니다.
  - 최소 폭력의 길이요? 그게 줘죠?
  -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남에 대해서, 또는 세계 전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폭력을 사용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폭력의 연쇄 반응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그 행동의 결과를 예상해 보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지도르는 책 무더기의 꼭대기에 그 책을 다시 올려 놓았다. 그러자, 그의 이야기를 예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책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 두 번째 중요한 개념은 <숫자에 따른 세계의 진화>입니다.
  뤼크레스는 의자 겸 책꽂이의 모서리에 무심코 걸터앉았다가 엉덩이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고 되도록 편안하게 고쳐 앉았다.
  - 내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날마다 수도 없이 숫자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일종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별 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는 그 그림들에는 온전한 하나의 가르침이 담겨 있어요. 그 그림들은 고대 인도인들이 발명한 것인데, 선의 모양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지요. 숫자들에 담긴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우선 숫자의 모양에서 둥근 선은 사랑과 해방을 뜻하고 가로줄은 집착과 구속을 의미하며, 선의 교차는 선택의 기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먼저 1부터 말씀드리자면, 1은 광물의 단계입니다.
  그는 그녀가 모양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허공에 숫자를 그렸다.
  - 1은 마치 거석처럼 꼼짝 않고 서 있어요. 1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그냥 존재할 뿐이지요. 곡선도 없고 가로줄도 없으며 선이 교차하지도 않아요. 따라서 사랑도 집착도 선택도 없어요. 광물의 단계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존재하는 거에요.
  2는 식물의 단계에요. 이 숫자에는 꽃줄기처럼 굽은 선이 있고 아래에 뿌리 같은 줄이 있어요. 2는 땅에 속박되어 있어요. 식물은 땅에 붙박여 이동할 수 없어요. 윗부분의 곡선은 식물의 줄기에 해당합니다. 2는 하늘을 사랑하지요. 식물은 하늘과 구름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고운 빛깔과 조화로운 맵시로 꽃을 아름답게 만들지요.
  3은 동물의 단계예요. 이 숫자에는 두 개의 곡선이 위아래에 있어요. 3은 하늘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지요.
  - 마치 벌린 입 두개가 겹쳐진 꼴이군요.
  취크레스의 말에 이지도르가 맞장구를 쳤다.
  - 맞아요. 두 입이 겹쳐진 모양이지요. 무엇을 깨물려는 입이 아래에 있고 입맞춤하려는 입이 위에 있어요. 3은 이중성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지 않기도 하지요. 가로줄이 없기에 땅에도 하늘에도 매여 있지 않아요. 동물은 늘 움직이며 두려움과 욕망 속에 살지요. 3은 본능의 지배를 받고 늘 자기 감정의 노예게 됩니다.
  이지도르는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교차시키며 말을 이었다.
  - 4는 인간의 단계예요. 교차로를 뜻하는 십자 모양의 상징을 품고 있지요. 교차로는 곧 선택의 기로입니다. 이 단계에서 잘 행동하면 동물의 단계를 떠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3의 동물 단계에서 5의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욕심과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본능적인 감성으로만 반응하기를 그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에요. 우리는 <좋아 - 싫어>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 5의 단계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죠?
  - 5는 영적인 인간, 정신적으로 진화한 인간의 단계예요. 위에 가로줄이 있는 것은 하늘에 묶여 있음을 나타내죠. 곡선이 아래로 향한 것은 아래에 있는 것, 곧 땅에 대한 사랑을 뜻해요. 이 숫자는 2를 뒤집은 모양이에요. 식물은 땅에 붙박여 있고,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 매여 있지요. 식물은 하늘을 사랑하고 영적인 사람은 땅을 사랑합니다. 앙드로 말로가 <세 번째 천년은 영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라는 말로 하고자 했던 얘기가 바로 이것일 거예요. 인간은 5이거나 5가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거예요. 우리가 도달할 목표는 이런 거예요. 칠정(七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본능적인 반응을 다스려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
  뤼크레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 그럼 6은요?
  이지도르는 깊은 뜻을 감추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그것에 대해 말하기에는 너무 일러요. 앞의 다섯 숫자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 지는 셈이에요. 나의 모든 활동이 단지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만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는 스스로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뤼크레스는 눈 앞의 허공에 다섯 숫자를 차례차례 그려 보며 말했다.
  - 참 묘하군요. 이 숫자들을 늘 보고 있으면서도 그저 셈을 하는 데 사용하는 기호로만 여겼지 거기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 사람들은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요. 다들 자기들의 선입견에 따라서 행동하고 모든 걸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는 육중한 몸을 한 번 흔들고 말을 이었다.
  - 어쨌거나 나는 미래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이 숫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가씨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래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왓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예요.
  뤼크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을 가로지르며 책을 성큼성큼 넘어갔다. 벽을 덮고 있는 자석 메모판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메모판들에는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 낸 글과 사진, 그림, 구입해야 할 물건들의 목록 따위가 붙어 있었다.
  - 그 반대예요. 선배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히려 제가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어요. 미래를 향해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를 알아야 해요.
  이지도르는 메모판에 붙어 있던 종이 한 장을 떼어 낸 다음 책 더미 아래에서 집었다 폈다 하는 쇼핑용의 작은 손수레를 꺼냈다.
  - 어디 가세요?
  - 아, 드디어 질문을 제대로 하시는군요. 어디 가느냐고요? 별일 아니고 그냥 장보러 가요. 시간이 됐어요. 채소하고 과일이 필요해요.
  -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그가 끄는 작은 손수레의 녹슨 바퀴가 삐걱거렸다. 밖으로 나와서도 그들의 대화를 계속되었다. 웃자란 잡초와 쐐기풀이 우거진 공터를 지나자, 양편에 작은 짐들이 늘어선 길이 나왓다. 그들은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이윽고 장이 서는 광장에 다다랐다. 오래된 작은 성당 맞은편에 채소와 과일을 파는 아낙들이 좌판을 벌여 놓고 있었다. 아낙들은 한결같이 뺨이 발그레하고 몸집이 단단해 보였다.
  이지도르는 자기가 먹을 것을 대충대충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멜론의 냄새를 오랫동안 맡아 보고 망고의 무게를 세삼하게 가늠할 줄 알며, 장수에게 물건이 언제 들어온 것인지를 물어 본 다음에야 토마토와 악어배를 고르고 양파에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 자기 양식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고르면서,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 자기 과거에 너무 홀려 있거나 매여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디어지게 마련이에요. (이 빨간 무 두 단 주세요. 예, 그거, 아주 빨간 거로요.) 자기의 미래만 바라보게 되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질 거예요. 과거에 너무 홀려 있는 것은 정ㅁ라 좋지 않아요. (이 배잘 익은 거죠?)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시대에 뒤떨어진 체제로 되돌아감으로써 자기네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을 생각해 보세요. 몽고에서는 칭기즈칸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서기 800년 무렵의 법률을 되살리려고 해요. 러시아에는 새로운 차르(황제) 체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어요. (이거 다 해서 얼마죠?)
  이지도르는 동전 지갑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셈을 치른 다음, 거스름돈을 받아 지갑에 넣고 과일과 채소가 든 봉지들을 작은 손수레에 실었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 과거는 되도록 빨리 청산하는 것이 좋아요. 정신분석이 사람들을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들을 과거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지요. 과거에 너무 집착해서 허구한 날 그것을 되작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ㅁ낳아요.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나을 거에요.
  그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뤼크레스가 조금 뒤로 처졌다. 뤼크레스는 그를 따라잡으려고 종종걸음을 쳤다.
  그때, 주택 단지의 골목길에 갑자기 자동차 한 대가 나타났다. 자동차가 그녀와 나란해지자, 문이 벌컥 열리며 두 팔이 튀어나오더니 그녀를 덥석 잡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뤼크레스가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의 입에 재갈이 물리고 천으로 눈이 가려지고 있었다.
  이지도르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혼자서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 돼요. 자꾸 뒤를 돌아보면 앞을 내다보는 것을 잊게 되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앞을 바라보다 말고 뒤를 돌아본다면, 나는 아마 여기 이 가로등에 머리를 쾅...
  차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다시 닫히자, 자동차가 타이어 마찰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튀어 나가듯이 출발하였다.
  자동차가 막 이지도르 카첸버그 옆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지나치려 할 때, 그는 차창 너머로 뤼크레스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원숭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의 억센 팔에 붙들린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p. 81-90



20. 미래의 나무
  그건 <미래의 나무>였다.
  이지도르 카첸버그가 뤼크레스 넴로드를 데려단 곳은 그의 저수탑 아래층에 꾸며 놓은 작은 방이었다. 방에 있는 거라곤 의자 두 개와 받침대 위에 올려 놓은 커다란 화이트보드, 그리고 그 판 가두리에 놓인 수성 매직펜이 전부였다.
  뤼크레스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다가가 거기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중략)

  - 전에 이야기하신 책에 나온다는 그 <최소 폭력의 길>이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나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찌요. 미래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여기에 적어 나감으로써 장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현재보다 더 좋은 미래를 갖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는 것이에요.
  그는 그녀 옆으로 와서 손가락으로 그림 속의 나무잎들을 가리켰다. 각 잎새마다 미래의 가정이 적혀 있었다. <만일 우리가 감옥 제도를 민영화한다면>, <만일 우리가 사회 보장 제도를 철폐한다면>, <만일 우리가 최저 생계 보조금을 인상한다면> 등과 같은 비교적 온건한 가정이 있는 가 하면, <만일 경쟁적인 경제 블록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이나 <만일 우리가 독재 체제로 되돌아간다면>, 혹은 <만일 우리가 정부들을 폐지한다면> 하는 식의 더 급진적인 가정들도 있었다. 더러는 일견 대단히 유토피아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망리 우리가 다른 행성들을 식민지로 만든다면>, <만일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출산율을 통제할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경제 성장을 멈추게 한다면> 등처럼.
  뤼크레스는 자기 옆에 잇는 공처럼 둥근 몸집의 남자를 아까와는 다른 눈으로 여겨 보았다. 단지 한 개인이 감히 인류 전체의 미래를 그런 식으로 그려 보려 한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한 순간 그를 비웃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녀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생각하고 공을 들여 만든 것이 실없는 농담 한 마디에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는 거였다. 그 모든 작업은 존중을 받아 마땅했다. 뤼크레스는 그의 작업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알고자 노력했다.

(중략)

뤼크레스는 나무의 가장 가느다란 가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는 우리 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 거라고 보세요?
  - 권력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갑니다. 처음엔 세계의 중심이 인도에 있었어요. 내가 보기에 인류의 문명은 지금으로 부터 5천 년 전에 인도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문명은 태양의 행로를 따라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과 이집트 인들이 인도인들의 뒤를 이어 권력의 정점에 올랐어요. 그런 다음 더 서쪽으로 가서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이 나타났지요. 문명의 중심축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부유럽의 제국을 거치고 네덜란드/플아스/스페인을 잇는 서유럽 경계선을 넘어 영국에 한동안 머물렀지요. 그러다가 다시 서쪽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어요. 권력은 이제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여 로스앤젤레스에 다다랐는데, 머지않아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중국과 한국이 있는 동북아시아로 아동할 거예요. 그 다음에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겠지요. 대륙과 국가들 사이를 오가는 권력 이동의 역사는 대충 그런 식으로 요약될 수 있어요.
  - 다른 문제, 이를테면 프랑스의 실업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이지도르는 심호흡으로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나서 대답했다.
  - 현대 서구 사회만 놓고 보면, 당연히 미래에는 더 이상 실업 문제가 없을 거라고 봐요. 전체 인구 중에서 10퍼센트는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며 아주 많은 일을 할 거이고, 나머지 90퍼센트는 전혀 일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비창조적인 집행자로서 산발적으로 이릉ㄹ 할 거예요. 창조적인 일을 하는 10퍼센트는 주로 개념을 다루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일에 열중하여 거의 모든 시간을 자기들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바칠 것이고 많은 돈을 벌 거예요. 하지만 돈 쓸 시간은 별로 없겠지요.
  - 그럼 나머지 사람ㄷ르은요?
  - 나머지 사람들이요? 비창조적인 일을 하는 90퍼센트는 직업을 자주 바꾸고 돈은 조금밖에 벌지 못하고 자기들의 한시적인 일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대신, 여가를 아주 많이 갖게 될 거예요. 그 90퍼센트는 자기들의 직업에서 자아를 실현하기보다는 레저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겁니다. 자원 봉사 단체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 지리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임시 사무 직원으로 일하는 한 아가씨가 있다고 합시다. 그녀는 때로는 베이비시터를 하기도 하고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아 촬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지역 환경 단체의 회원으로 내세우게 된다는 것이지요.
  - 창조적인 일을 하는 10퍼센트는 주로 <개념을 다루는 사람들>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된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 아, 그것은요, 미래에는 특별한 발명이나 발견, 혁신이 더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과학 기술이 전 세계에 동시에 알려지기 대문에,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차, 똑같은 세제, 똑같은 컴퓨터를 갖게 돼요.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것 대신에 이것을 사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겉모양과 색깔, 상품의 이름, 상표에 적힌 진술, 광고 문구, 판매방식 등에서 <조금 더 낫다>는 점이 시장의 판도를 좌우하게 되겠지요.
  - 그렇게 10 퍼센트가 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비창조적인 일을 하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요?
  - 그건 교육이라고 하는 또 다른 주제와 관련이 있어요. 내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이지요. 장기적으로 보아서 학교의 역할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습니다. 학교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저마다의 창조적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지요.
  - 누구나 다 창조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건 아니잖아요!
  - 왜요, 누구에게나 타고난 재능이 있어요. 하지만 누구나 다 자기 재능을 발견하고 발달시키는 건 아니지요. 학교가 그것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교육의 목표를 학생들 각자의 특별한 재능을 계발하는 데에 두고 더욱 다양한 교육ㅇ르 제공해야죠.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하늘이 자기에게 내린 것을 잘 발전시켜서 자기의 남다른 점과 특별한 재능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일 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억지로 공부를 하기보다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 일에 즐겁게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중략)

p. 108-116

아버지들의아버지(상)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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