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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text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김남주옮김/민음사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는 포도주를 한 모금 길게 마셨다. 폴은 반박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선고로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가장 지독한 형벌이죠. 저로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 그보다 더 피할 수 없는 것을 달리 모르겠습니다. 제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나, 나를 사랑해줘 하고 말입니다."
 "저 역시 그래요." 그녀는 의지와는 달리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간 그녀는 자기 방의 침대 맞은편 벽면을 떠올렸다. 커튼이 쳐 있고 유행 지난 탁자가 놓여 있고 왼쪽에 작은 옷작이 있는 그 벽을 그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라보았고, 앞으로 십 년은 더 바라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외로운 상태로. 로제, 로제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늙어 가라는 선고를 내릴 권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녀 자신조차도...... .

43,44p


6장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 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 삶의 이런 단계에서 누가 대답을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그녀는 전축을 열고 음반을 찾아보았다. 이미 외우고 있는 바그너의 서곡이 있는 음반의 이면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브람스의 콘체르토가 있었다. 초제는 바그너를 좋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건 훌륭해. 좀 시끄럽지만 이런 게 음악이지." 그녀는 브람스의 콘체르토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첫 부분이 낭만적이라고 여겼지만 음악 중간에는 듣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악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아쉽게 생각했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팻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물론 그녀는 스탕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실제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그저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경험이란 좋은 것이다. 좋은 지표가 되어 준다. 스무 살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누구에겐가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누꼈다.
  그녀는 시몽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뭐라고 대답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리라. 자신이 그 연주회에 가려는 것인지 아닌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전화를 받은 시몽의 말, 시몽의 목소리에 따라 달라지리라.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고 자신의 그런 망설임을 기분 좋게 음미했다.

56,57,58p


  "장난꾸러기 시몽(그녀는 그를 언제나 이렇게 불렀다.), 당신의 편지는 너무 슬프더군요.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사실 난 당신이 없어서 쓸쓸해요.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이상 잘 모르겠어요. 시몽(그녀는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쓴 다음 정말이지 근사한 이 두 마디를 덧붙였다.), 빨리 돌아와요."
  그는 저녁 식사가 끝나는 대로 즉각 돌아가리라. 파리까지 아주 빠르게 달려가리라. 그녀의 집 앞으로 가면 어쩌면 그녀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2시에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30분 후 자동차 한 대가 그의 앞에 와서 섯고 폴 혼자 내렸다. 길을 건넌 그녀가 출발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게 폴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폴을 부르고, 폴과 만나고, 폴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겁에 질린 채 고통스럽고 공허한 마음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78p


  "오늘 저녁 약속 같은 건 없어. 이리 와. 내가 해 줄게."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침대 위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맷부리가 수갑인 양 덜렁거리는 두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젋은 청년의 매끄럽고 여윈 손목이었다. 소매 단추를 채워 주던 폴은 문득 자신이 언젠가 똑같은 동작을 한 적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건 정말 연극 같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조그맣게 행복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시몽의 머리카락에 뺨을 갖다 댔다.
  "그럼 난 6시까지 뭘 해야 되지?" 시몽이 고집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도 모르지...... . 일하러 갈 거잖아."
  "그럴 순 없어. 그러기엔 너무 행복한걸."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일을 못할 건 없잖아......!"
  "난 그래. 게다가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어. 산책을 하면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생각하면서 혼자 점심을 먹고, 그런 다음 6시가 되기를 기다릴 거야. 알다시피 난 패기에 찬 젊은이는 아니거든."
  "당신 상사는 뭐라고 할까?"
  "모르지. 어째서 당신으 내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기를 바라는 거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내 현재뿐인데말이야.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라고 대답하며 그는 요란하게 절하는 시늉을 했다.
  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후 며칠 동안 시몽은 자신의 말 그대로 행동했다. 그는 차를 타고 파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한 시간에 열 차례 폴의 상점 앞을 지나갔고,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고 책을 읽다가 때로는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휴식을 취했다. 그는 행복한 몽유병자처럼 행동했고, 폴은 그런 모습에 감동해 그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돌연 그런 일이 그녀 자신에게 거의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여겨지는 데 깜짝 놀랐다.

106,107p


  신호가 가자마자 시몽이 즉각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여보세요."라고 하자 그는 웃기 시작했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일어났어?"
  "11시부터 일어나 있었어. 지금 1시야. 전화국에 전화해서 전화가 고장이 아닌지 물어봤어."
  "어째서?"
  "당신이 정오에 전화하기로 했잖아. 어디야?"
  "뤼지 식당이야. 이제 점심 식사를 할 참이야."
  "아! 그래." 시몽이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가 건조하게 덧붙였다.
  "로제와 점심을 먹을 거야."
  "아! 그래...... ."
  "당신은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나 봐. '아! 그래...... .'라고 말이야. 늦어도 2시 반에는 상점으로 돌아갈 거야. 당신은 뭐 해?" 그녀가 물었다.
  "어머니 집에 가서 옷을 몇 벌 가져오려고 해." 시몽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걸 당신 옷장 옷걸이에 걸어 놓고, 데스노스 기념관에 가서 당신 마음에 들 수채화를 찾아볼 거야."
  한 순간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전혀 관계없는 두 구절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다니, 정말이지 시몽다웠다.
  "그런데 왜? 옷장은 당신 집에 있는 게 좋지 않아?"
  그녀는 그를 만류하기 위해 좀 더 진지한 이유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댄단 말인가? 시몽은 그녀 곁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고, 지금까지는 그녀도 그 사실을 나무란 적이 없지 않앗던가...... .
  "그래. 당신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만항. 나는 경비견이 될 생각이고 그에 걸맞는 복장을 갖출 거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 전화에 한 시간이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제가 위층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여러가지를 물을 것이고, 그녀는 그를 앞에 두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해."라고 말하며 시몽은 전화를 끊엇다.
  전화박스 밖으로 나오면서 그녀는 화장실의 거울 앞에서 기계적으로 머리에 벗질을 했다. 거울 속에는, 방금 누군가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은 얼굴이 있었다.

110,111p


  "하지만 스무 살 때에는 지금과는 생각이 달랐어. 뚜렷하게 기억나.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했지."
  그랬다. 그녀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욕망에 쫓겨 거리를, 해변을 쏘다녔다. 그녀는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생각을 찾아 헤맸다. 요컨대 하나의 대상을 찾아서. 3대에 걸쳐 여자들의 머리 위에 감돌았던,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지가 그녀의 머리 위를 감돌고 있엇다. 당시에도 장애물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제 그녀는 새로 개척하는 대신 갖고 있는 것을 지키려 애쓰고 있엇다. 직업을, 그리고 남자를...... .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추구해 온 그런 것들에 대해 그녀는 서른아홉 살이 된 지금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시몽은 그녀에게 몸을 맞대고 잠이 들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물었다.
  "자기, 자......?" 이 두 마디 말에 반쯤 잠에서 깬 시몽은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향기 속에서, 그들의 뒤섞인 열기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그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141p



  첫 작품이 나온 지 오 년 만잉라고 해도 24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써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여기서 문장부호가 물음표가 아니라 점 세 개로 이루어진 말줄임표로 끝나야 한다고 사강은 강조한 적이 있다.)는 몇 가지 중요한 장치들로 인해 그녀의 재능을 단순한 '재기'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든다. '성격이 곧 팔자'라는 셰익스피어식 경구를 상반되는 기질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환기시키는 것 외에도, 뻔한 전개나 통속적인 결말 대신 삶의 의표를 찌르는 통찰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독자는, 역시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클라라 슈만을 평생 마음에 품었던 요하네스 브람스를 떠올리게 되는데, 대개의 프랑스인들이 브람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한 브람스 전기 작가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대중으로 하여금 브람스에게 흥미를 갖게 만드는 건 거의 절망적인 시도라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브람스의 연주회에 상대를 초대할 때는 이 질문이 필수라는 말도 있다.)을 떠올리면, 이 제목은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와는 다른 울림을 갖는다.
  사강의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덧없음이다.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갑니다. 좋아요, 삼년이라고 해 두죠." 또한 그녀의 작품에는 심오한 철학도 참여 의식도 이데올로기도 참신한 소재도 없다. 구성은 가볍고 묘사는 감각적이며 대화는 암시적이고 문체는 유난하지 않다. 하지만 재즈처럼 리듬감 있게 펼쳐지는 그 문장들 속에는 장치 아닌 장치들이 내재해 있다. 시점과 시제, 생각과 말이 구분 없이 뒤섞임으로써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감성으로 매혹시킨다. 작품 속 현실에 대한 기존의 지배권을 작가 자신이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현실적인 생동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많은 진지한 작가들에게 중요했던 꼼꼼한 사실묘사에 대한 강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드레스란 남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벗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물건"이고, "사랑에 대해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것을 견디게 해 주는 것뿐"이다. 그녀가 집중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엄정하고 깊숙하고 철저하다.
  전후 세대의 문화적 욕구를 시의적절하게 충족시켰다든지, 부르주아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풍자가 설득력을 얻었다든지, 낭만주의와 포스트실존주의가 행복하게 만났다든지 하는 평들에 이어 바로 이 점이야말로 사강 문학의 독보적인 특징이다. 개인적으로는 줄곧 성인의 삶 속에 편입되지 못한 채 좌충우돌의 지극히 문학적인(!) 삶을 살았다 해도("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그녀의 말은 우리나라 어떤 작가에게 그랬듯이 내 마음을 죄어들게 한다), 남녀의 심리와 개인의 심리를 통해 인간의 어떤 보편적 심리층의 단면도를 제시함으로써, 기질과 숙명의 그래프를 그려 냄으로써 프랑수아즈 사강은 저 라신의 반열에 오른다. 프루스트가 그어 준 자신의 한계 그 끝에 도달한다. 페스트균처럼 뻔한 결말로 독자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멜로드라마에 머무는 대신, 갑자기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지는 각성의 '엔딩'을 선사하고 문학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강을 다시 읽는다.


2008년 봄
김남주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엘뤼아르의 시 (눈 앞의 삶), 라신의 비극 (베레니스), 보들레르의 시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