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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text

[보통의 존재] 언니네이발관 보컬 이석원 산문집 중

_진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권리와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진실
    늙은이도 젊은이와 똑같은 권리와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진실
    어른도 아이와 비슷한 권리와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진실

    우리가 잊고 사는 그런 진실



_해바라기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후두둑' 창문을 때리며 내리는 빗소리만 들어도 내 가슴은 너무나 뜨겁게 반응했다. 
그럴 때면 난 해바라기의 <저 빗속으로>를 틀어놓고 반복해서 들으며 종로 세운상가 앞길을 비를 마즈면서 뛰고 또 뛰었지.
뛰다가 비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 틈을 헤치고 버스정류장에 들어서면, 교복을 여중생이, 그러니까 여주인공이겠지.
나를 의식하며 서 있는 거야
  우리는 모르는 남남인데 아직 사귀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는데도 우린, 이미 사귈 거 다 사귀고
벌써 가슴 아픈 이별이라도 한 것처럼 괜히 아프고 마음은 들뜨고 그랬어.
     그게 단지 집에 가만히 있다가 비 한줄기 내렸다고 내 마음속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야.
     그 일은 비가 올 때마다 반복해서 벌어졌지.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비가 오면 어떠냐구?

'아, 비는 왜 오고 지랄이야' 하겠지. 그래도 아직 한여름에 내리는 소나기는 좋아해. 소나기는 정말로 운치와 재치가 있거든.
짧고 굵게 낭만적으로 쫙 한 번 내려주고 바로 해가 뜨니 말이야
  비뿐만이 아니야. 어렸을 때는 지금의 어른들 마냥 마치 세계여행이라도 다녀오지 않으면 감성이 충족이 안 되는 것처럼 초조해할 일이 없었다.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와 낮에 해주는 외화시리즈 한 편만 봐도 120분 동안 <인디아나 존스> 한 편은 본 것 같은 만족이 있었어. 날씨, 뉴스, 집에 찾아온 손님, 학교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 동네에서 벌어진 일, 친구가 이사를 가고 전학을 오고, 마당 평상에 누워 새까만 밤하늘에 눈부시게 많았던 별들을 보며 환상적인 기분 속에 잠이 들곤 했던 모든 일들이 아마도 어른이 돼서 뉴욕을 다녀왔네, 스페인에 가서 본토 샹그리아를 먹고 왔네 하는 것보다 훨씬 진한 느낌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어렸을 땐 참 그렇게 뭐든지 컸고 진했다.

우리집 마당 화단엔 할머니가 가꾸던 갖은 꽃들과 채소들이 있었지
내 얼굴만큼 큰 해바라기도 몇 그루나 있었어. 그런데 지금 내가 사는 집에는 마루에 엄마가 기르는 화분들이 좀 있고 내 방 컴퓨터 옆에 전자파를 막아준다는 화초가 한두 녀석 있긴 하지만 아무 느낌이 없어. 왜 어렸을 때 혼자서 화단 근처에서 놀다 꿀벌이 앵앵거리며 왔다갔다하는 걸 잽싸게 신발로 잡아 빙빙 돌려서 기절시킨 다음, 마지막으로 바닥에 패대기를 쳐 확인사살까지 시킨 후 바라보던 그 해바라기. "나 잘했지??" 하고 바라볼 수 있던 그 해바라기가 지금은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일에 몰두도 해보고 여행도 꿈꾸고 하지만 아무리 해도 해바라기는 다시 생길 수 없는 거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 



_위로

극심한 분열로 인해 내내 괴로워하던 중,
내일의 안부를 모니터 위 고양이에게 묻는 것으로...
마침내 작은 위로를 받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도 해주는 위로를, 왜 사람은 못해주는 걸까.

 

_ 스무 살이 넘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시공간이 정지한 채 오직 너와 나만이 존재하던 시간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 마음이 멀이지는 걸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충격과 상실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종말은 순간은 너무 빨리 찾아왔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다.


- 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나를 황홀하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언제나 내 귀에 들려온 순간 사라져버렸다.
말이란 이처럼 존재와 동시에 소멸해버리기에
그토록 부질없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
 근데 말이야.
나는 이제 서야 겨우 작은 할 일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그 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어.
한때는 정말이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도 있었거든.
근데 막상 이유가 생겨도 여전히 힘들고, 무료할때도 많고, 일을 마치고 나면 허탈하고...
그런 건 똑같은 것 같애.
단지 마음속에 예전에 없던 어떤 희미한 무언가,그저 작은 거 하나 들어 있는 기분은 들어.

이게 바로 생의 의미라는 거겠지.


이 작은 걸 찾기 위해서 다들 그렇게 애쓰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