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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끄적끄적

<가을>


_ 가을이라 그런가. 조금만 더 기울이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자주 코끝이 찡하고 마음이 아프다.



_ 가을이라 그런지 그리워지는 것이 많아지고 네 생각이 자주 난다.

뭐가 그렇게 겁이 났니, 우리 이야기에서부터 달아나 혼자가 되버렸던 너는 많이 아픈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그 밤의 것들로 인해 나는 울었더랬다. 그런 밤이 있었고 사무치게 그리운 대상이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지나고 말, 그 이야기가 가슴에 콱 박혀서는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오늘처럼.

  어데서 체리향 비슷한 짙고 탁한 단, 향이 풍겨오고 나는 무력하게 속수무책으로 그것에 마음을 내 주고 있다.
책들을 뒤져보기도 하고 빵을 씹어보기도 하고 물을 마셨다가 글을 쓰다가 공부를 하고 음악을 듣다가
그래도 안되겠어서 처음인 것처럼 다시 글을 쓴다.

마음 어덴가에서 단풍처럼 붉고 짙은 물이 번지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듯 하다.



_ 너와 첫 데이트를 한 날은 오늘처럼 햇살이 좋고 바람이 선선했던 가을날이었다.

트렌치 코드에 원피스, 구두까지 갖춰입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교대역으로 갔다.
먼저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너를, 먼저 찾고도 짐짓 모른척 다가갔다. 놀라며 웃던 너. 너를 닮은 손으로 따뜻하게 마시라고 내민 캔커피, 내 손에 쥐어준 그 마음이 좋아서 오래도록 그 캔 하나를 쥐고, 오래도록,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는 쭈뼛쭈뼛 2호선에서 4호선을 갈아탔고 과천 대공원 역에 내려 미술관으로 향했다.
은행이 온전히 제 빛으로 빛을 받아 빛을 내고있었고,
그곳엔 너와 내가 있었다.

  여러 마음들이 담긴 사진들을 보러가며 내 마음 하나가 감당 안되 얼굴엔 연신 어설픈 미소가 가득했고, 그럼에도 마주보는 눈빛이 좋아 즐거워했다. 활짝 웃는 파일럿 사진 아래에 서서 '이게 내 꿈이야, 미래야' 하던 너가 멋졌고 자랑스러웠다.
그건 흐린 기억으로 남은 수십장의 사진 중 내가 온전히 기억하는 유일한 그림이기도 했다.
너와 웃고 있는 너의 미래 같은 것들.

  촌스럽게 생각됐던 많은 것들, 그럼에도 동경했던 장면의 하나처럼,
과천저수지를 가르는 레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너의 그 말 하나를 애타게 기다렸던 순간이 내게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소리가 없던 그 시간이 지나고 그림같이 펼쳐진 가로수길을 걸으며 들었던 너의 고백을 기억한다.
나뭇잎   노란 빛   발걸음 속도   내 손을 조심스레 잡던 너   손의 온도   옆모습   보조개  그런 것들이 엉켜 하나의 단상을 만들었는데 그게 여태껏 남아 아직도 너를 그리게끔 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다가 처음이 그렇게 찾아든게 즐거워 웃었고 내 어깨를 감싼 든든한 너의 팔을, 나는 사랑해 했다. 드디어 만나고 만났고 만날 우리가 기뻤고 기뻤다.

  저녁 어스름할 때가 되어 도착한 보라매 공원의 누추한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고, 웃었다.
돌아보니 촌시럽고 또 허름한 그 가게에서 하필 첫 식사를 했다는 것이 웃기고 슬프다.

눈이 아파 눈물이 찔끔 계속 아프다가도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주면 내색없이 웃음이 먼저 났다.
내가 나인게, 그토록 좋았던 그날 - 벤치에 앉아 내 눈이 예쁘다며 어루만져주던 그 손과 빛과 소리를 기억한다.
그렇게 부끄럽게 눈을 맞추고 손을 맞추고 입을 맞췄다. 헤어짐이 아쉬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고 손을 흔들었던,
그 곳에 너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그토록 애틋했던 우리는 만난 날을 채 백일도 채우지 못하고, 한 골목길에 앉아 헤어졌다.
종로 어덴가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내 마음 같은 것은 되찾아올 생각도 못한 채 나는 집으로 돌아와 울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찬 나를 보며 란형이 눈물을 꾹 참으라 했던 것과 너를 쫓아가 손에 쥐어줬던 스노우볼과 길가에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편지 같은 것들이 여전히 기억나는 것을 보니, 나도 참 어지간한 여자애다 싶기도 해

  그렇게 쉬이가지 않던 그날 밤, 새벽까지 소라네 방바닥에 누워 침대에 발을 올리고서 둘다 엉엉 울었다.
아파서 울었고 보고싶어 울었고 미워서 울었고 보답받지 못한 마음이 안 되어 울었고 이 소식을 믿겨하지 않던 친구를 보고 또 울었다. 오랜만에 소라에게 그 날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날이 있었다며 신기해 했고, 편한 웃음이 나와 서로 깔깔 웃었다.
웃으며 추억할 날이 되었다고 한 번씩 너를 욕하다가도 오늘 같은 날은 니가 그립다 하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싶기도 해 -

  함께하고 싶었던 많은 일과 나눈 약속들과 시간들이 문득 가슴을 스칠때면 처음보다는 덜하지만 아직도 아득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해서 되려 너를 가렸던 들뜬 마음이 이토록 짙은 이야기를 남겼나 보다, 생각하면
쓰다듬어주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안아주고 싶기도 하다.
여전히, 그날에 머문 시간들이 조금, 가엾고 아프다.

지난 가을의 지나지 않은 단상들


2010.10